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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0.14 미국인 남자와 결혼했을 때 감당해야 하는 것 (74)

중고등학교 때는 나도 스포츠광팬이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렸을 때는 가수나 배우를 좋아하는 것 만큼 스포츠 선수를 좋아하는 것이 하나의 성장과정이었다.


중학교때 한일 배구경기가 있었는데, 하종화 선수의 엄청난 활약으로 2:0으로 지고 있던 한국팀이 연속 세 세트를 내리 이겨 기적적인 승리를 거머쥐고 하루아침에 대중들에게 배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그 경기를 끝까지 본 사람은 없었다. 그날  한밤에 해주던 중계가 갑자기 3세트 중간에 끝을 내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그 경기를 보다 만 반친구들 몇몇이 아침에 어찌나 호들갑을 떨었던지. 기적적인 승리도 그랬지만, 학교에 오자마자 하종화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그리고 일본의 나카가이치는 또 얼마나 멋진지 이야기꽃을 피웠고, 결국 우리는(당시에 우리는 인천의 여중생들이었다)하종화 선수를 보기 위해 마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버스를 타고 서울 장충체육관으로 주말마다 배구경기를 보러 가곤 했다.(정말 나도 한 때는 '빠순이'었다!) 학교의 농구팬들이었던 친구들과 배구선수가 멋지네, 농구선수가 멋지네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었고.

뿐인가, 고등학교 때는 LG트윈스의 전성기였는데(또 나는 이때 다시 서울로 이사와서 서울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야구장도 더 자주 갔다),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 세 명의 젊은 야구선수들에게 열광하며,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야간경기를 가곤했다(역시 야구 경기는 주말 경기가 아니라 야간경기가 제맛이다).

하지만, 스무살이 되고, 소개팅과 미팅을 하며 남자에 대한 판타지를 가질 필요가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나의 스포츠스타 사랑은 막을 내렸고, 가끔씩 남자친구들과 스포츠이야기가 나오면 장단을 맞출정도만 알게 됐다.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축구는 A매치만 보는 여자들, 아니면 월드컵만 보는 여자들, 나말고도 많지 않나?


하지만, 내가 남편과 함께 일요일마다 축구도 아니고 야구도 아니고 심지어 농구나 배구도 아닌, 미국의 풋볼을 보게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남편은 대단한 미식축구 광팬이라서, 결혼하고 미국에 오면서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일요일만큼은 TV채널의 자율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심지어는 시어머니조차 남편고향의 풋볼팀 티셔츠를 나에게 선물로 보내주셨다.

위스콘신 출신의 남편의 팀 이름은 그린베이 패커스(GreenBay Packers).



게다가 이 팀이 미국에서 상위에 드는 풋볼팀이라서, 나의 시가족들의 풋볼사랑은 정말 대단하다. 가끔 남편이 "네가 제일 좋아하는 팀은 어디?" 하고 물으면 나는 반사적으로 "그린베이 패커스!"라고 대답해야 한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 하면 나는 남편을 놀려주느라 "톰 브래디!"라고 대답한다. (톰 브래디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팀 소속이고 유명한 슈퍼모델 지젤의 남편이다)


뭐가됐든 평일에는 한없이 성실한 남편이 주말이 되면 늘어지게 누워서 하루종일 이팀 저팀의 모든 경기를 보고, 컴퓨터까지 펼쳐놓고 다른 팀의 상황을 보고, 뉴욕이라 그린베이패커스 경기를 안해주면 실망하고, 때로는 각 팀의 프레스 컨퍼런스까지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조금 이른 시간에는 차마 맥주는 못 마시고 계신 남편님


드디어 오후 네시가 넘어가면서


그린베이 패커스의 티셔츠를 입고


와이프가 일하느라 커피를 네잔째 들이키는 동안 옆에서 맥주를 열심히 드시고 계심.


그러다 문득 그 옆에서 열심히 한국 잡지사의 마감에 정신이 없는 나의 뻘건 눈을 발견하고는 미안했던지

"뉴욕댁, 너는 좋은 아내야, 나의 축구사랑을 이해하는 너는 최고." 하고 뜬금없는 멘트를 날린다.


그리고 한달 전 쯤 그린베이패커 팬들이 모이는 바를 집 바로 근처에서 발견하고 환호를 날렸던 그는, 일요일에 혼자 바에 나가서 50불을 술값으로 탕진하고 몇주째 스스로 자숙하며 집에서 TV 시청으로 만족하는 중.


딜린저스라는 바에 이런 G마크를 발견하고 환호.


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의 풋볼 사랑을 마냥 예뻐하는 와이프가 있어서는 안되기에, 나는 가끔씩 그를 놀리곤 한다.

"그린 컬러에 옐로 컬러라니. 너희는 그런 것도 모르니? 경기를 잘하려면 상대방을 제압하는 컬러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린에 옐로? 야, 그건 유치원 삐약삐약 컬러 아냐."

그럼 새삼스럽게 부르르 흥분하며 반격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정말 하나의 재미다.

"원래 그린베이패커스의 컬러는 그린에 골드야. 옐로가 아니라고."

"뭐라구? 너 색약이야? 저게 무슨 골드니 옐로지."

"원래는 골드를 나타내려던 거라고. "

"그렇다고 치자. 어쨌든 그린에 골드, 서커스 컬러야?"

"그린에 골드! 이건 엄연히 우아하고 고상한 기개를 나타내는 컬러라고!"

"서커스 컬러, 아님, 뭐야, 치어리더 컬러? 아님, 어릿광대 컬러 아닌가?"

"아냐!!! 그냥 톰 브래디나 좋아해버려."


하지만, 어느새, 나 역시 남편과 풋볼을 이야기하는 좋은 아내(진짜다! 좋은 아내다!)가 되어버린 나. 그러나 축구의 국제경기만 보듯, 나도 풋볼은 수퍼볼만 보기로. 남편에게 이정도 숨쉴구멍은 만들어줘야, 주중에 다시 잔소리를 하지. :)

Posted by NYCbride